이리역 폭발사고는 당시까지 발생한 최대의 폭발사고였다.
6·25 전쟁 말고 폭발사고로는 당시까지 10명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망자만 59명이었으니 엄청난 사고였음에 틀림없다. 이후로는 각종 폭발이나 화재, 붕괴 등
각종 안전사고로 수십명에서 100명 이상에까지 이르는 사망자를 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참사였다.
문제는 각종 대형사고가 발생하면 다시는 그와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그 사고에서 많은 교훈을 얻는 것이다. 사고원인을 철저히 분석, 점검해서 근본부터 치유해
다시는 똑같은 사고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방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리역 사고도 당시에는 우리 철도운송과 화약류 등 위험물 운송 시스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 정우수 현 이리역장(55)은 “당시 사고는 우리나라 철도의 위험물 수송원칙을
새로 보완하거나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사고 직후 정부에서 대규모 점검단을
내려 보내 무엇이 사고의 근본 원인인지 철저히 조사했다”며 “그와 같은 조사를 바탕으로 화약류
운반 열차가 역내에 진입하면 우선적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등의 행동요령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정 역장은 또 “사고로 피해가 컸지만 반대의 측면에서 보면 그같은 대형사고를 계기로 또 다른 사고를
막기 위한 학습을 한 측면도 있었다”면서 “그 이후론 그같은 대형 철도사고가 없다는 것이
교훈을 잘 활용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같은 철도 당국의 운송체계 점검 노력과는 달리 이 대형참사를 잊지않고 길이 교훈으로
삼으려는 흔적은 사실상 남아있지 않는 것이 문제다. 특히 사고 당사지역인 이리시, 즉 현 익산시의
노력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는 기술적인 분야나 해당 기관 한 두곳에서 점검하고 잊어버려도 되는 사고이기
보다는 사회 전체적으로 두고두고 교훈을 되새겨야 할 의미를 가진 사고였다. 이 사고가 단순히 철도나 위험물 운반 체계나 관리 실수로 일어난, 그 분야만의 사고로 한정하기에는 사회 많은 부분이 관련이
돼 있기 때문이다.
이리역 열차사고 또한 원칙을 무시하고 호송원을 한 명만 배치했다거나, 위험물 차량은 곧바로
다음 역으로 통과시켜야 한다는 등의 기본적인 관리지침만 지켰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고였다.
또 그같은 대형사고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숨지거나 다치고, 그 가족들은 한 없는 슬픔에 가족을
해체당하고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지역사회는 물질적으로 보상받고 길을 새로 내거나 건물을 지어
발전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한 없는 슬픔이나 지역 이미지 손상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형식이든 그 같은 교훈을 잊지 않고 자꾸 되새겨 다시 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후세들에게까지 가르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익산시내엔 그런 큰 사고가 그 때 있었다는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사고 이후 역사는 현대식으로 바뀌었고 무너진 건물은 새로 지었다.
그러나 사고를 잊지 말자는 기념물이나 민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푯말하나 없다.
이리역 구내에 당시 숨진 철도청 직원들을 기리는 작은 탑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사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소장물도 없다. 당시 사고와 관련된 기록은 `익산시사(益山市史)'' 교통체신편에 2페이지 분량이 있을 뿐이다. 당시 무수히 찍었을 사고 현장이나 수습과정, 이후 복구노력 등에 대한 어떤 사진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관하지 못하고,
당시 수습과정에서 기록했을 많은 상황들에 대한 일지들도 남아있지 않다.
익산시청은 “시간이 너무 흘러 보존연한이 지나 폐기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청 어느 한 쪽 구석이라도 당시 자료를 모아놓았을 것으로 생각한 취재팀의 물음에 익산시청은
사고 직후 찍은 낡은 사진 몇장만 제시했다. 그나마 추가로 필요한 사진은 당시 사진을 찍었던
시민에게 부탁해 얻어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각종 자료나 유물이 어디엔가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 당시 이리시 창인동장으로 수습과정에 참여했던 정규철(70)씨는 “사고 이후 몇년동안 시청 정문
오른쪽엔가 폭발 당시 부서지거나 날아온 기관차 잔해, 그리고 현장 사진 등을 전시해 놓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당시 공보실에 사진기사가 사진을 많이 찍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따라서 시청 어딘가에는 이들 자료가 묵혀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 몽땅 처치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근무중인 직원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고의 역사성을 무시하기는 철도청도 비슷했다.
익산역측은 당시를 눈으로 보여줄 자료는 갖고 있지 않고 사고 발생 한참 후에 작성한
`이리역 폭발사고 개요''만을 보관하고 있다. 사고 전말과 피해내용을 적은 것이 내용의 전부다.
익산역 관계자는 “언론에서 하도 물어오는 일들이 많아 만들어 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시 참사 희생자를 추모한 사업이나 행사도 전무한 실정이다.
**사고 낸 신무일씨
1977년 11월 11일 운명의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인 신무일(당시 36·당시 거주지는
인천시 논현동)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일 밤 술에 취해 화약용 상자 위에 촛불을 켜고 자다 폭발사고를 낸 한국화약 호송원 신씨는
기록상으로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돼있다.
신씨는 사고 직후 체포돼 구속됐다. 검찰은 1978년 2월 10일 방화 및 폭발물 파열 치사상죄를 적용,
신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이후 신씨는 전주지법에서 열린 1심에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광주고법에 항소했다. 그러나 광주고법은 그해 7월 13일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항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신씨는 적어도 10년 형은 살았을 것으로 보이나 이후 만기출소했는지,
감형 또는 사면 됐는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한편 취재팀은 신씨의 행방을 찾기 위해 동일 이름을 가진 비슷한 연배의 인물을 찾았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복구주역 정규철씨
사고 당시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이리시 창인동장을 지낸 정규철(70)씨도 이리시의 역사적
무감각을 안타까워했다. 정씨는 “당시 시청 마당 한쪽에 기관차 잔해 등이 있다가 사라져버렸다”며
“어디에 뒀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대통령 방문 사진 등을 크게 뽑아 시청 입구에
한동안 붙여 뒀는데 그것도 없어졌다”고 밝혔다.
그는 “개인적으로 희생자들의 추모제나 당시를 기억할 작은 공간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폭발사고때부터 사고가 수습될때까지 최일선에서 일해 당시 사고수습과정을 가장 잘
아는 공무원 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는 “그날 9시15분께 역앞에 있던 동사무소에서 퇴근준비를 하던중 갑자기 폭음과 함께 정전이 됐고 거리에 나가봤더니 아비규환이 돼 있었다”며 “그때 시체가 나뒹굴고
환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차들을 징발해 환자를 수송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증언했다.
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위해 텐트를 마련하고 겨우살이를 준비하던 일도 새롭다”고 말했다.
동장을 맡은 지역인 창인동 희생자가 많은 탓에 정씨는 후에 `보상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2천여건에 달하는 피해를 심의 보상하는 과정에서 단 한건의 잡음도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 시민이 긍지이자 보람”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당시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피해자들 가운데 한 시인이 짓고 주민들이 서명해 만들어 보낸
`재난의 길목에서''라는 시 액자를 가장 소중한 선물로 간직하고 있다.
<자료출처 / 광주일보 발췌 >
'생생한 이야기 >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湖南), 영남(嶺南)의 유래 (0) | 2007.08.24 |
---|---|
아름다운 격포 (0) | 2007.08.22 |
77년 이리역 폭발사건기록2 (0) | 2007.08.11 |
77년 이리역 폭발사건기록1 (0) | 2007.08.11 |
쏘는 것과 더치 페이 (0) | 2007.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