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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이야기 /여행 이야기

77년 이리역 폭발사건기록2

by Richard Phyo- 2007. 8. 11.

 이리역 폭발사고는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와 가수 하춘화(49)씨간의 사연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22살의 인기절정이던 가수로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관객 500여명을 두고 공연중이던

하춘화씨는 폭발로 부상을 당했다. 또 함께 공연중이던 이주일씨는 하씨를 업고 병원으로

옮겨 치료토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신문에는 하씨가 실종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으며

극장 주인 등 10여명이 숨졌다. 이 사고와 관련 하춘화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싣는다.


▲당시 사고순간을 설명해 달라.
당시 나는 콘서트중이었다. 9시에 공연이 시작되자 오프닝 공연으로 히트곡을 10여분 부르고

다음 공연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분장실로 들어갔다. 당시 11월이었기 때문에 쌀쌀해

나는 난로를 쬐고 있었고, 내 개인 전속 사회자였던 이주일씨는 무대에 나가기 위해 거울을 보고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그런데 그 순간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무너진 극장 지붕이 쏟아져 내렸다.

땅이 뒤집어지고파묻히는 느낌이었다. 전쟁이 난 줄 알았다.

당시엔 남북관계가 긴장국면이었잖은가. `이건 북한의 침략이구나'', `폭탄이 또 터지면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지붕이 무너진 이후 상황은
폭발소리와 함께 정전이 되고 암흑으로 변했다. 당황한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의 별이

보일 정도였다. 어둠속에서 이주일씨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는 소리에 서로 생사를

확인한 뒤 이주일씨가 나를 끌고 더듬더듬 밖으로 나왔다.극장 밖으로 나온 뒤 극장과 외부 사이에

있는 담벼락으로 이주일씨가 먼저 올라갔다.

담 위에서 나를 끌어 올린 뒤 이주일씨가 먼저 뛰어내리고 나한테 뛰어 내리라 했지만 무서워서 못했다. 그러자 이주일씨가 자기 머리를 딛고 내려오라고 해 그렇게 했다.

▲알려진 바로는 이주일씨가 업고 탈출했다고 하는데
그랬다. 담을 넘는데 성공하자 이주일씨는 자기 등에 업히라고 했다. 나는 당시 긴 치마를 입고

있어서 걷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등에 업혔는데 이주일씨가 자꾸 넘어지는 것이었다.

그 때 어떤 건장한 청년이 다가와 “누구냐”고 묻자 이주일씨가 “하춘화씨다”고 하니까

그 청년이 “업히라”며 나를 업었다. 혹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이주일씨는 그 남자 팔짱을

끼고 따라왔다. 우리는 근처에 있던 숙소인 호텔로 갔다. 그 곳에 자가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자가용 지붕도 내려앉고 길 바닥은 온통 하얀 유리조각들로 가득했다.

이미 거리에는 피투성이의 환자들이 즐비하고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어떻게 탈출했는가
당시 차에는 기사와 제 아버지가 같이 계셨는데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모두 차 지붕을 두드려 펴고

군산으로 향했다. 가면서 보니 길가에는 사진에서 보던 6·25피난 행렬처럼 사람들이 대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많이 다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 데 피해정도는 어떤가
다행히 이렇다하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어디가 아픈지 경황도 없었지만. 2시간만에

군산도립병원에 도착해 보니 유명인이라고 산모들이 쓰는 따뜻한 방을 내줘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침대가 없어 땅바닥에 누워있고 30분 간격으로 환자들이 밀려들어왔다.

도착하자마자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본 의사가 “어깨 뼈 골절”이라며 상반신에 깊스를 했다.

이틀 뒤 서울의 각 대학병원들이 나를 자기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모두 차를 보냈는데

한양대학병원으로 입원했다. 그런데 서울에 가서 다시 검진해보니 오진이었다. 어깨 타박상 정도였다. 문제는 이주일씨였다. 도착해 보니 두개골 일부가 함몰될 정도의 중상이었다.

자꾸 넘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주일씨는 서울에서 수술후 한달 넘게 입원했다.

나는 그보다 먼저 퇴원했다.

▲당시 신문에 행방불명이라는 얘기는 왜 나왔는가
워낙 신속하게 군산으로 이동해버린 통에 내가 없어진줄 알았던 것이다. 당시 `하춘화 실종''이라는

말에 박정희 대통령도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행방불명 이야기는 다음 날 늦게 해결됐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자들이 몰려왔다.

▲사고 이후 이리시와의 어떤 인연이나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입원 한달만에 퇴원하자마자 구 서울시민회관에서 이리시민 돕기 콘서트를 열었다. 또 1주년이

된 때에도 이리 시민회관에서 이재민 돕기 콘서트를 해 수입금 전액을 기탁했다.

당시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이리시민들이 매우 고마워했다. “이리에서 국회의원 나오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군의관 윤장현씨**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해 화제가 됐던 인물도

있었다.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화제의 주인공은 현 광주 중앙안과 윤장현(54) 원장. 폭

발사고 당시 광주 국군통합병원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 원장은 텔레비전을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한 뒤 곧바로 의료지원단을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가 부상자들을 치료해 줬다.

그러나 윤 원장이 당시 그같은 발빠른 지원활동으로 칭찬을 받았지만 사실은 지휘관의 허락도 없이

독단적으로 했던 행동이어서 더욱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겼다.

윤 원장은 “당시 젊은 군의관으로서 내 임무에 충실하고 싶었고 항상 환자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출퇴근하지 않고 병원에서 숙식하며 지내고 있었다”며 “사고 당일도 부대 내에 있는데 텔레비전을

통해사고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 소식을 듣자 마자 `이건 어떻게든 출동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전북이면 광주 통합병원 지원 위수지역이어서 `우리 관할인데''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군인정신이 바짝 들어있었고 산악인 출신이라 현장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는

설명이다.그는 “곧바로 병원장을 찾았으나 연락이 안되고 당직에게 출동을 건의했더니

지휘관 지시가 없다고 갸우뚱 했다. 안되겠다 싶어 `나쁜 일 아니니 나 혼자라도 가자''고 생각하고

위생병과 간호장교 20여명을 뽑은 뒤 장비와 함께 현장으로 내달렸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한 밤중에 현장에 도착한 윤 원장은 남성고 강당에 진료반을 차리고 곧장 파편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생겼다. 지휘관에게 보고도 없이 병력과 장비를 빼내 이동해 버렸으니

병원에서는 난리가 난 것이다. 윤 원장은 “당장 철수하라며 호통을 쳐서 `알았다''고 철수준비를

하려는데 느닷없이 군 고위 관계자들이 밀려들었다.

군사령관, 참모총장 이런 분들이 오더니 `초동출동을 잘 했고 환자를 치료하느라 정말 고생했다''며

격려를 했다. 상황이 반전돼 버린 것이다”고 말했다. 가까운 논산지구병원에서도 오지 않았는데

멀리 광주에서 왔으니 당연한 칭찬이었던 셈이다.

결국 현지에 의무부대까지 차려지고 윤 원장은 그로부터 3개월 동안 그곳에서 더 활동했다.그는

 “나중에 훈장과 표창이 내려오고 요란했는데 장기 근무자들에게 양보했던 기억도 난다”고 말했다.

 

**전국민 온정의 손길 민관군 복구**
이리역 폭발사고로 한국화약 신현기 사장을 비롯해 한국화약 관계자 및 철도청, 대한통운 직원 등

7명이 무더기로 사법처리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재판과정에서 대부분 형이 감량돼 중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다만 폭발사고의 주범인 신무일(당시 36)씨만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소후 신씨의 행방에 대해서는 일체 알려진 바가 없다.

이리역 폭발사고후 복구과정은 12만 이리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땀과 노력이 모아졌다.

온 국민이 저금통을 모으고 구호성금품을 보내 상처를 치유해 전국 각지에서 모두 5억6천만원의

성금이 모아졌고 쌀 8만8천kg의 쌀을 비롯해 58만점의 각종 성금품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은 사고 현장 주변이나 텐트촌에 대형 가마솥을 걸고 라면을 끓여

지원했고 재건의 삽질에 나섰다. 군부대 지원도 많아 공수부대와 공병, 의료부대가 복구작업을 도왔다. 사고후 1개월간 응급복구에 투입된 인원만도 25만8천명, 각종 차량은 1천388대에 달했다.

복구에 들어간 비용은 피해액의 5배인 200억원이 들었다.

이런 노력으로 사고 이후 이리시는 크게 달라졌다. 이재민들은 1년여의 텐트생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국적인 도움의 손길과 민·관·군의 복구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역사는 새로 지었으며 당시 집을 잃은 이재민 가운데 2천여세대가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로 이주했다.

이리시내는 새로 도로를 뚫고 재건사업을 통해 “시 발전을 30년은 앞당겼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자료출처 / 광주일보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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