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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이야기 /여행 이야기

77년 이리역 폭발사건기록1

by Richard Phyo- 2007. 8. 11.

 

지난번 북한 평안북도 룡천역 폭발사고 소식이 전해진 순간, 40대 이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리역 폭발사고''를 떠올렸다. 역 구내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사고와 수 많은 인명피해,

특히 폭발로 생긴 깊은 웅덩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순간적으로 `이리시''와 `룡천시''의

모습을 오버랩시켰다.
올해로 27년, `이리역 폭발사고''는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에 일어났다.
지금은 익산시로 바뀐 이리시는 당시 인구 13만의 조용한 작은 도시였다.

특히 폭발사고가 발생한 그 순간은 많은 시민들이 집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다투는 한국과 이란

축구대표팀간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천지가 진동하는 폭발음 소리와 함께 도시는 암흑과 공포,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인천에 있던 한국화약에서 화약 30톤(다이너마이트용)을 싣고

광주로 가던 이리역 구내 입환(入換) 4번선 철로에 대기하고 있던 열차가 폭발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다이너마이트용 화약 800상자, 뇌관 36상자, 초안폭약 200상자, 흑색화약 3상자 등

도합 30.28톤.`쾅''하는 대형 폭발음은 약 15초 간격으로 세 번이나 이어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는 것이 이리시민들의 증언이다.


당시 6살이었던 소설가 김남중(33)씨는 최근 발간된 `기찻길 옆 동네''(창비 간)라는 어린이소설 속에

당시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이리역 폭발사고의 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린 눈으로 보고 묘사한 사고 현장과 당시 피해상황이었지만 상황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당시 역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던 김남중씨의 경우는 그래도 `간접 피해''지역에 든다.
직접 피해지역에 살았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리역 바로 앞 창인동에 살았던 박정근(71)씨의

증언은 더욱 생생하다. 창인동은 역전일대여서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의 하나.

당시 역 앞에서 작은 여인숙을 운영하던 박씨는 그 날 밤 노모와 세 아들, 부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쾅하는 폭발음이 들리더니 순간적으로 전기가 나갔어요.

잇따라 벽이 넘어지고 유리파편이 튀는 등 집은 거의 완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죠.

저는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행히 다른 식구들은 무사했습니다”.


사고 당시 현장을 취재 보도한 전남매일신문(1977.11.13·현 광주일보)에는 사고 현장 피해자나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렇게 실려있다. “조윤경(25·이리시 창인동)씨는 저녁식사도중 쾅하는 소리와

함께 전깃불이 나가고 집이 무너져 30여분 동안이나 흙더미속에 갇혀 구조대원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와보니 4살 먹은 아들은 죽어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리시 중앙동에서 TV상을 한다는 노병조(34)씨는 거래처에 수금을 나갔다가 자전거를 타고

이리역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쾅하는 폭음의 압력 때문에 자전거와 함께 4m정도까지 떠밀려 넘어졌다고 밝혔다”. 당시 피해규모는 우리나라 폭발사고중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 사고로 59명이 숨지고 중상자 185명, 경상자 1천158명 등 모두 1천402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주민들 외에 근무중이던 철도 공무원들도 모두 16명이나 숨졌다.
또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m이내의 가옥 등 건물은 완전히 파괴됐고 반경 1㎞이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갔으며 반경 8㎞이내의 유리창까지 파손됐다.

완파된 건물이 811동, 반파 780동였고 경미한 피해를 입은 건물은 6천여동이었다.

이재민 수는 1천674세대, 7천873명에 달했다.피해지역별로 볼 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지역은

이리역 부근의 창인동과 모현동 일대였다. 특히 주로 서민 주거밀집지역인 창인동의 경우는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도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이리역 건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객화차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고, 역사구내에 있던 객화차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졌고 선로는 휘어지고 모두 1천650m가 파손됐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이리역 다음 역인 부용역에 근무했던 정우수 현 이리역장(55)은 “폭발력이 얼마나 셌던지

현장에서 700m 떨어진 시내 우리 집앞에까지 화차 상판이 날아왔었다”고 말했다.

사고 원인은 어처구니없는 인재였다.


당시 수사당국의 사고원인 발표에 따르면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씨는 술을 마시고 화차 속에서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잠이 들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켜놓은 촛불이 잠든 사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대폭발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화약회사 호송원의 허술한 안전의식과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구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로 통과시켜야 하는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리역 등 총체적인 `안전 불감증''이 빚은 사고였던 것이다.

호송원 신무일씨는 당시 수사과정에서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데도 무려 22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 동안 역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화가나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술을 마신 신씨는 화약종이상자 위에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다가 화재가 나자 진화에 실패하고 도주했다가 붙잡혔다. 위험물질을 운반하면서 호송원 1명이 책임졌고 역 당국도 `목적지 직송원칙''을 어기고 구내에 장시간 대기시킨 점 등이 모두 문제로 드러났다. 철도운송 제46조는 ‘화약품의

운송은 되도록 도착역까지 직통하는 열차로 운송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사고 책임을 물어 당시 한국화약 신현기사장을 비롯해 화약회사, 철도청, 대한통운 관계자 등 7명과 신무일씨 등이 무더기로 구속됐고 신무일씨는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닮은꼴의 북한 룡천역 폭발**


지난번 발생한 북한 룡천역 열차폭발 사고는 1977년 11월11일의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룡천 대폭발 사건의 참상은 질산암모늄을 실은 화차와 유조차가 동시에 폭발해 피해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리역에서는 정차해 있던 열차에 실린 수십톤의 다이너마이트가 한꺼번에 폭발해 일어난

사고였다. 차이가 있다면 이리역은 폭발에 의한 붕괴피해가 주였다면 룡천역 사고는 붕괴피해외에도

화상에 의한 피해가 크다는 점.  이리역 참사의 인명피해 규모는 59명 사망과 1,400여명 중경상.

룡천역 사고는 161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1,300명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이리역 사고는 열차 호송원의 실수로 인해 화재가, 룡천역 사고는 위험성이 있는 두 열차를 근접시켜

작업을 하는 등 안전관리 부실이 주 원인이었다.

원인을 두고 이리역 사고의 경우 북한 간첩에 의한 행위설, 룡천역 사고는 김정일 암살기도설 등이

돈 것도 비슷하다.  두 지역 모두 대규모 이재민이 발생해 천막을 치고 수용했다는 점,

사고후 전국 또는 세계 각국의 온정이 이어진 점도 유사하다.

사고후 이리시에는 전국에서 5억6천만원의 성금과 쌀 8만8천kg, 구호물품 58만점이 전달됐다.


한편 비슷한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는 익산시(시장 채규정)는 지난 룡천지역 이재민을 돕기 위해

1억21만원 상당의 소독방제기와 라면, 속내의 등 구호물품을 마련해 적십자사에 기탁했다.

특히 이 가운 8천571만원은 시민들의 성금이어서 77년 당시 전국의 구호물품으로 재기한

익산시민들의 보은의 마음을 알수 있게 했다.

익산시는 7월까지 세차례의 구호물자를 전달키로 했다.


<자료출처 / 광주일보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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