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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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표대박(表大㺪) 시조 표대박(表大㺪)은 오계시대(오대의 문란해진 시대)에 후주의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있다가 960년(고려 광종 11년) 장(張), 방(方), 위(韋), 변(邊), 윤(尹), 진(秦), 감(甘), 황보(皇甫) 등 8성씨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기록은 없어서 알 수가 없고 그의 후손 표인려(表仁呂)가 고려 충숙왕 때 합문기후를 지내고 좌리공신으로 온창백(溫昌, 신창)에 봉해져서 표인려를 중시조로 하고 본관을 신창으로 하였다. |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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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이다. 그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혔으며 당대의 명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연산군 원년 응교(應敎)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승지·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종직을 칭찬하는 말을 사초에 적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경원(慶源)에 유배 도중 죽었다. 그 후 갑자사화 때 다시 부관참시 당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 선조 때의 표헌(表憲)과 광해군 때의 표정로(表廷老) 부자는 다같이 명역관(名譯官)·명문장으로 유명했고, 인조 때의 무관 표정준(表廷俊)은 김상헌과 절친해서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청 나라에 잡혀가는 김상헌을 끝까지 수행하여 칭송을 들었다.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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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빙(表憑) : 문과(文科) 중종8년(1513)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표연말(表沿沫) : 문과(文科) 성종17년(1486) 중시 병과(丙科) 표공말(表沿沫) : 문과(文科) 성종3년(1472) 춘당대시 병과(丙科) 표윤(表贇, 1486 丙午生) : 문과(文科) 중종15년(1520) 별시 을과(乙科) 표계(表繼, 1486 丙午生) : 문과(文科) 세종11년(1429)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표영중(表永中, 1486 丙午生) : 문과(文科) 세조2년(1456) 식년시 을과(乙科) 표계의(表啓義, 1604 甲辰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표계백(表啓白, 1608 戊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표성(表○, 1620 庚申生) : 무과(武科) 인조27년(1649) 정시 병과(丙科) 표개불(表介佛, 1608 戊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22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6명, 무과 8명, 사마시 7명, 역과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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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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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12世孫은 11代孫) |
▣ 본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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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 신창(新昌)은 충청남도 아산시(牙山市)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기량현(祁梁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 溫陽)에 속하게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신창을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하여,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하였다. 1018년(헌종 9)에 천안부(天安府)에 이속되어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 후 조선에 와서는 태조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군으로 승격되어 홍주부 아산군, 1896년에 충청남도 아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아산군 학성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17년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되었다. 1995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이 되었다. |
▣ 인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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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신창표씨는 1985년에는 총 5,629가구 23,613명, 2000년에는 총 7,805가구 24,82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펌; 족보박물관 jeobok.re.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