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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이야기 /생활 이야기

서울숭례문(남대문)에 대하여

by Richard Phyo- 2008. 2. 12.
서울숭례문(남대문) 서울崇禮門(南大門)
 

 

 
 
-지정번호
:
국보 제1호
 
-지정연월
:
1962년 12월 20일
  -시 대
:
조선 태조 5년(1396)
  -규모·양식
:
1동 정면 5칸ㆍ측면 2칸, 건평 53.79평, 2층의 우진 각 지붕 다포집
  -재 료
:
석조 기단, 목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가 세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이다.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이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지다가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는데, 숭례문이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

 

1962년에 발견된 대들보 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

(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때의 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 후 32년이 지난 성종10년(1479)에

이르러 숭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대들보에 의하여 성종 10년 4월 2일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채수(蔡壽)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숭례문을 증수할 때 중국의 예에 의하여

문 밖에 옹성(甕城)도 쌓자고 하였으나, 성종이 "우리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일일이 중국을

본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숭례문까지 쳐들어온다면 그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니 옹성이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답하여 흥미롭다.
지금은 숭례문 중앙이 문이 아니라 양옆으로 난 도로가 지난날 성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오늘날의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되었고, 서쪽에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은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광무(光武)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파괴가 가속화되었고, 특히 숭례문 남쪽으로부터

남산이 정상에 이르는 성벽은 남산광장에 일제가 소위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는 남산광장에서 정상에 이르는 도보 길에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ㆍ

측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처마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윗 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굴곡이 심하지 않다.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 성내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불과 몇 채 안 남은 건물 중의 하나로 비교적 고려말 이래의 다포(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출처:서울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