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사부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을 복속시킨 하슬라주 군주. 삼국사기에 의 하면 배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놓겠다고 위협하는 계책을 써서 우산국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 맹수인 줄 알고 항복하였다 한다.
6세기초,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512) 이후 우산국은 신라 뿐 아니라 고려왕조 이후에도 내륙의 왕조와 조공관계를 맺고 토산물을 바쳐 왔다. 11세기초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우산국은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늦어도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섬으로 되어 버린것 같다.
2. 이규원
조선시대의 무관.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울릉도(독도 포함) 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규원은 천혜의 보고인 울릉도와 독도에 왜인들이 침입, 벌목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땅인 양 입표까지 한 것에 분개하여 일본공사에 항의함은 물론 일본 외무상에 항 의문서를 발송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감동한 고종은 그간의 '공도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재차 항의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무인도가 되어 있던 울릉도에 현지 조사를 한 결과 일본 어부들이 출어하여 벌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문책하여 돌려 보냈다. 그후, '이규원 울릉도 검찰일기' 를 조정에 제출하여 이를 통해 조정은 일본에 항의 공문을 보내고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도록 조치했다.
3, 안용복
조선시대의 민간 외교가. 본래 경상도 동래출신 어부였던 그는 1693년(숙종19년), 울릉도에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독도에 정박시킨 후, 우리나라 바다를 침범해 고기를 잡은 사실을 문책하고 단신으로 일본 도근현에 가서 국경을 침범한 사실을 항의,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이듬해 일본 막부 대마도주를 통하여 공식으로 일본의 '출어 금지'를 통보해 왔다.
4. 홍재현 일가
홍재현은 조선시대 호조참판을 지내다 울릉도에 유배된 조부를 따라 울릉도에 정착했다. 그는 독도에 나타난 왜인들을 물리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고히 밝히고 돌아왔다.
그후 계속된 일본의 독도 침입은 그의 아들 '홍종욱'이 대를 이어 막아냈으며 손자인 '홍순칠'은 그 유명한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었다. 홍재현 일가는 3대에 걸쳐 독도를 지켜온 산증인들이었다.
5.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의 3년 동안의 활약상은 전설적인 실화로 전해져 내려온다.53년 울릉도 출신 전역군인들이 상사 출신인 홍순칠(87년 작고)씨를 대장으로 하여 '우리 시대 마지막 의병' 의 기치를 내걸게 된 것은 일본이 한국전쟁중 우리 행정력의 공백기를 틈타 독도에 '일본령' 이라는 한자표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울릉도 주민 '홍순칠'은 울릉도 경찰서장으로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소총 등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울릉도 전역군인들을 이끌고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에 주둔했다.
그 후 일본이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이들을 위협했으나 이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6. 최종덕
1980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 " 단 한 명이라도 우리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울릉읍 도동 산 67번지 서도 벼랑어귀에 주민등록을 옮긴 최종덕씨의 독도사랑 정신은 독도를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는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수정법, 특수어망을 개발하여 서도 중간 분지에 물골이라 는 샘물을 발굴하는 등 초인적 노력을 쏟으며 살다 1987년 생을 마쳤다.
7. 조준기
최종덕씨의 사위로 울릉도 주민이었던 조준기씨는 장인의 뜻을 이어 지난 86년 7월 독도로 전입해 수산물 채취권을 이어 받았다.조준기씨는 92년에 강원도 동해시로 이주하였다.
<출처: 인터넷> |